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빈 회의 (문단 편집) == 회의 결과 == [include(틀:상세 내용, 문서명=빈 체제)] 빈 회의의 결과로 형성된 유럽의 체제를 [[빈 체제]]라 부른다. [[발칸 반도]]의 [[그리스인]]이나 [[이탈리아 반도]] 등 주변부에서의 소요에도 불구하고, 빈 체제는 프로이센 왕국, 러시아 제국, 오스트리아 제국의 [[신성 동맹]]을 중심으로 '''유럽 협조 체계 개념'''(Concert européen)에 기초하여 40여 년간 유지되었다. 이후 정치적으로는 1848년 프랑스 [[2월 혁명]]과 메테르니히의 실각, 외교적으로는 1854년 시작된 [[크림 전쟁]]을 기점으로 붕괴되었다. 다시 평화가 복원된 것은 1840 ~ 60년대 [[리소르지멘토|이탈리아 통일전쟁]]과 [[프로이센-오스트리아 전쟁|보오전쟁]], [[프로이센-프랑스 전쟁|보불전쟁]]을 거친 1871년이었고, 이것은 '''[[오토 폰 비스마르크|비스마르크 체제]]'''라고 불린다. 이렇게 다시 40년간 평화가 지속되다가 빈 회의부터 정확히 100년만인 [[1914년]] 모든 열강의 대 전쟁인 [[제1차 세계 대전]]이 벌어지면서, 빈 체제가 고안한 오랜 평화는 마지막으로 산산조각이 났다. [[보수주의]]의 등장이란 점에서도 빈 체제는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. 의외로 프랑스는 패전국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큰 손해는 보지 않았다.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명분 때문에 프랑스 자체가 쪼개지지도 않았다.[*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. 1814년 프랑스 전역에서 오스트리아 황제 [[프란츠 2세]]의 아우 [[카를 루트비히|카를 대공]]을 수반으로 이전 합스부르크령인 [[알자스]], [[부르고뉴]] 등을 묶어서 프랑스에 떼내 새로운 군주국을 만드려고 했으나 프로이센 왕국과 러시아 제국 등이 가볍게 무시했다.] 당시 유럽에서, 혁명 이전 [[부르봉 왕조]]의 프랑스와 혁명 이후 [[보나파르트가]]의 프랑스는 각각 다르게 이해되었다. 무엇보다 프랑스를 패전국이라고 아주 [[개발살]]을 내버리면 세력의 균형은커녕 다른 국가들이 제2의 프랑스가 되어 또다시 유럽의 패권을 거머쥐거나, 프랑스에 지나치게 가혹한 강화조약을 할 경우에는 [[프랑스인]]이 정부를 인정하지 않을테고 그러자면 외국군대를 계속 주둔시켜야 했고, 주둔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전쟁이 이어지기 때문이었다.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, 그리고 오스트리아 제국이 폴란드-작센 분할 문제로 인해 갈등이 극에 달할 동안 당시 프랑스의 외교관이었던 [[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|탈레랑]]이 이 갈등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이득을 보았다. 정확히는 메테르니히가 주도했고 탈레랑이 여기에 제대로 결탁한 것이었다. 메테르니히는 영국의 캐슬레이와 짜고 탈레랑을 승전 4국[* 러·오·영·보(=프로이센)]의 비밀회담을 방청할 수 있게 하면서 군사 동맹까지 맺어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의 팽창을 위협하였다. 메테르니히는 스스로 나서서 조정자 역할을 자임하고 정통주의와 복고주의 드립을 친 덕 때문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협상력을 떨어뜨려 영토적 국익은 많이 챙기지 못했다. 앞서 프로이센 왕국과 러시아 제국에 맞서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이 노리는 [[바르샤바 공국]](폴란드)와 작센 병합 문제를 오스트리아 제국의 메테르니히가 대단히 경계했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는 프로이센 왕국과 러시아 제국이 밀착해서 동유럽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운신폭이 좁아졌고 장기적으로 프로이센 왕국은 작센 대신 [[라인란트]] 지방을 발판으로 경제력이 일취월장해서 독일 [[관세동맹]]을 구성하는등 [[독일 연방]]에서의 영향력을 후진적 농업국인 오스트리아 제국보다 높였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[[독일 통일]]을 주도하는 발판을 조공으로 바친 셈이 되었다. 프랑스가 빈 회의에 참석한건 부르봉 왕조 복귀의 영향이 있고 당시 국제정세에서 프랑스를 아예 배제할 수 없어서였다.[* 백일 천하 때는 동맹국에서 프랑스가 아닌 개인 '''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]]'''에게 선전포고했다.] 단순히 메테르니히가 대단해서이거나 [[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|탈레랑]]이 [[먼치킨]]이라서가 아니다. [[프로이센 왕국]]은 [[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]]가 무능해서 이용당했다는 소리가 나오는데, 프로이센 왕국의 대표자는 물론 국왕이었으나 실제 실무는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 수상이 일임했기 때문에 호구 잡힐 일은 없었다. 그리고 다른 나라 외교관들이 장님들만 있는것도 아니었고 실무진도 있었기 때문에 한두 사람의 무능으로 결과가 바뀌고 뒤집힐 일은 아니었다. 4대 승전국 중 [[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]]과 [[러시아 제국]]의 발언력과 [[그레이트 게임|대립]]이 가장 컸고[* 이 두 국가만이 당시 유럽 국가들 중 유이하게 나폴레옹에게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웠다. 다만 러시아의 경우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전에 잠시나마 나폴레옹이 조성한 소위 신 유럽 질서에 자의 반으로 편입한 전적이 있다. 또한 러시아는 기존의 대 동맹전에서 서유럽에 파병한 적은 많았지만 핵심적인 활약은 불분명했다. 나폴레옹의 [[러시아 원정]]이 실패하고 [[러시아 제국군]]이 유럽 본토로 본격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지분이 높아진 점이 있다. 반면 영국은 나폴레옹이 스스로 인정한 '''최대의 적국'''으로 나폴레옹의 집권 이전 [[프랑스 혁명 전쟁]] 초기인 '''1793년부터''' [[아미앵 조약]]으로 인한 평화 기간(이것도 상호 평화 조약이었지, 어느 한쪽이 굴복해서 맺은 종전 조약은 아니었다.) 1년을 빼고 '''1815년까지''' 계속 프랑스에 맞섰다. 나폴레옹의 세력이 가장 강했던 1807 ~ 1811년 사이엔 오직 영국만이 유일하게 프랑스와 맞설 수 있었다. 당대 최강이었던 [[영국 해군]] 덕에 본토가 침공받을 위험이 없이 전쟁기간 내내 함대결전에서 100% 승리하고 전 유럽의 해상을 장기간 봉쇄할 수 있었고 [[영국 육군]]도 1808년부터 [[이베리아 반도]]에 파병되어 웰링턴의 걸출한 지휘하에 1814년 종전 무렵엔 남프랑스에 진입했다.] 프로이센 왕국은 러시아 제국에 붙고 오스트리아 제국은 심판보는 척 하면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에 동조하는 입장이었다. 결국 백일천하가 겹치고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가장 큰 목표였던 세력 균형과 유럽 평화를 위해서 각국이 양보를 하면서 [[협상]]이 타결되었다. 이 국면에서 메테르니히의 여러 활약상은 [[헨리 키신저]]가 『회복된 세계(A World Restored: Metternich, Castlereagh and the Problems of Peace, 1812-1822)』에서 대가다운 필치로 정리해놓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